여행

서쪽으로 계속 가는 중

Check Fabric 2020. 7. 14. 22:29

늦게 잠들었지만 오늘만큼은 알람을 맞추고 일찍 일어났다. 아침 일찍 노보시비르스크 역에 길게 정차하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기차 안에서 본 다큐멘터리에서 횡단 열차가 딱 절반이 되는 도시가 이 도시라고 해서 긴 정차시간을 틈타 구경해보고 싶었다. 또 러시아에서 제일 규모가 큰 도시라고도 한다. 혹시나 내가 긴 정차 시간을 착각하진 않았을까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가는 길을 죄다 사진으로 찍어두고 플랫폼을 빠져나와 기차역 앞으로 조금씩 발을 내디뎠다. 결과는 성공적! 나와 보길 정말 잘했다. 이번 역도 참 재밌는 모습이었다. 이때까지 거친 역 중에 제일 크고 멋있었다. 대체로 높은 천장을 가진 러시아역은 영화 속에서 보던 무도회장 같은 느낌이었다. 바깥 풍경이 재밌다고 해도 친구들 없이 홀로 나온 게 괜히 불안해 빠르게 구경하고 다시 기차 안으로 돌아왔다. 아직 30분이나 더 정차해 있어야 하는 기차였다.

집 나온 지 12일이 되는 날이었다.
일찍 일어난 김에 남은 과일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 이번 기차에는 이렇게 led 전광판에 날씨와 시간 차 번호를 나타내 주고 있다. 나타샤가 어제부터 클레이로 만든 고양이도 보여주고 그림도 그려서 보여주더니 고양이를 좋아하나 싶었는데 나에게 폰으로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를 보여주었다. 하얀색의 귀여운 아기 고양이었다. 귀여워.. 어제는 다샤가 자기가 찍은 거라며 조커 분장을 한 영상을 보여주었다. 나와 친밀감이 점점 쌓이고 있나 보다.

11시쯤 바빈스키라는 역에 30분 긴 정차를 했다. 이 역은 기차 모형도 있고 큰 마트도 있어 잠시 나가보기로 했다. 마트에서 저렴하게 과자를 두 봉지를 사서 커피와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긴 막대과자는 프레첼 같이 짭짤하니 계속 손이갔다.


이번 즉석밥은 기차에서 내리기 전에 뜨거운 물에 담가 놓았다. 그래도 뜨거운 물이 오래 놔두니 예전보다 더 괜찮은 밥맛이 났다. 라면 먹으면 밥이 먹고 싶고 밥을 먹으면 라면이 먹고 싶다. 그래서 친구들 라면 국물을 몇 번 뺏어먹었다.

밥 먹고 먹은 커핀데 쇠맛이 나서 당황스러웠다...

점심을 먹은 후 또 한 번의 시간이 바뀌었다. 카잔까지 가는 데 총 네 번의 시간이 바뀔 예정. 이번에는 경이가 그리는 우리의 모습. 그림을 선물해주니 친구들이 다시 우리의 모습을 그려서 선물해주었다.ㅋㅋㅋㅋㅋ 특징을 잘 잡아서 그린 것 같다. 염색 모가 남은 내 투톤 머리도 잘 캐치해서 그려준 게 너무 웃겼다,,

이건 아마 경이의 얼굴이었던 것 같다. ㅎㅎ

다시 찾아온 평화.. 창문을 보며 누워 있으니 하늘을 달리는 것 같았다. 기차를 타다 보면 똑같은 풀밭 그 풍경 속에서 독특한 꽃들이나 나무 등 순간적으로 눈에 띄는 자연풍경이 보일 때가 있는데 내가 카메라로 찍는 순간에는 나타나지 않아 아쉬웠다. 풍경을 찍어도 찍어도 모자란 이유.. 이번에는 이쑤시개처럼 생긴 하얀 나무들과 노란 풀밭을 찍지 못해 아쉬워하는 중이다. 시간이 지나 보니 많이 찍으면 찍을수록 좋다고 느꼈다. 메모리만 충분하다면 말이다. 기차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소리, 사소한 친구들과의 대화가 담긴 음성 사진 영상 모두 지금 보면 다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편지도 써서 보내준 친구들

저녁으로는 아껴두었던 치즈 불닭볶음면을 먹었다. 한국인의 매운맛을 맛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날씨도 더워서 두 배로 매워진 느낌. 경은이가 가져온 통조림 깻잎이 정말 맛있었다. 어느 순간 또다시 바뀐 시간. 5시를 한 번 더 살고 있다.

오늘은 고양이를 그려준 친구


15분 정차역에서 불량식품에서만 볼 수 있는 형광 초록색의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모히또 맛 아이스크림.

친구들이 가져온 마쉬멜로우 거의 먹진 않았다.

오늘의 할 일은 밀린 일기 쓰기. 밖에 없으니 이제 남은 일정은 저녁노을 촬영하기 ^^! 두 시간이 늘어서 총 26시간을 살게 된 날이었다. 내일 아침 9시 55분이 되면 모스크바와 같은 시간에 맞춰지게 된다. 드디어 기차역에 표시되는 시간과 동일한 시간을 살게 되는 시간대가 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7시간 차이 났던 게 기차를 타면서 점점 좁혀지더니 드디어! 대륙은 대륙이다 정말.


오늘도 멋진 무지개 빛 노을과 함께! 물에 비친 노을을 찍지 못해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하루이다.